한 권으로 꿰뚫는 루터의 신학
이 책은 감히 루터 전집(바이마르판)을 대체할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저작물의 역서들 가운데 본 선집만큼 한 권의 단행본에 많은 저작물을 실은 책은 없다. 루터에 관한 책은 많지만, 번역된 그의 저작물은 많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은 루터 전집을 제외하고, 그의 작품을 직접적으로 참고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서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고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호소함』은 물론 종교개혁의 문을 연 『95개 조항』과 『하이델베르크 논제』와 『세속 권세: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는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또한 존 웨슬리가 회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로마서 서문』, 그리고 『루터의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 등이 실려 있다. 본서에 수록된 저서들 가운데 일부는 전문(全文)이고, 일부는 발췌문이지만, 해당 저서의 핵심내용을 살피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본 선집에 실린 작품들만 이해하면 루터 신학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1994년 당사에서 출간했던 『루터 저작선』의 디자인 개선판으로, 본문 내용은 구판과 동일합니다.)
역자 서문
독자들에게
서론: 마르틴 루터
제Ⅰ부
루터의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
성경과 관련된 서문들
- 서문
- 로마서 서문
- 야고보서와 유다서 서문
- 시편 서문
그리스도인의 자유
두 종류의 의
제Ⅱ부
갈라디아서 주석
노예 의지론
제Ⅲ부
요리문답에 관한 설교들, 1528
라이프치히의 플라이센부르크 성에서의 설교, 1539
교회의 바벨론 포로
제Ⅳ부
세속권세: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
기독교계의 상태 개선에 관하여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호소함
제Ⅴ부
부록
95개 조항
하이델베르크 논제
참고문헌
종교개혁자이자 개신교 신학의 아버지인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스펠트와 아이제나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뒤,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1502년과 1505년에 각각 문학사와 문학석사 학위를 받는다. 출세를 열망하던 아버지의 강권으로 법대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만, 슈토테른하임에서 만난 뇌우 아래서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한다. 곧바로 학업을 중단하고 2주 만에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1507년 사제로 안수받게 된다.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로 성서학을 가르치며 발견한 ‘칭의’의 진리는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게 만든다.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정문에 내건 ‘95개조 논제’는 종교개혁을 촉발하는 동시에 중세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 된다. 교황의 파문과 보름스 제국의회에서의 추방령(1521년), 농민전쟁(1525년), 수녀원에서 탈출한 카타리나 폰 보라와의 결혼(1525년) 등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고향 아이스레벤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수많은 논쟁과 굴곡의 시기를 거치지만,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는 목회자이자 말씀에 사로잡힌 신학자로서 개신교 신학의 대문을 열게 된다.
독일어 성경번역을 통해 성경의 대중화를 이끌어 표준 독일어 형성에도 공헌한 루터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교육, 문화, 사회복지, 법, 정치를 아우르는 종교개혁의 이론적 토대와 방향을 제시한다. ‘루터의 3대 논문’으로 꼽히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교회의 바벨론 포로』『기독교인의 자유』(이상 1520년)가 종교개혁적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저술로 꼽히지만, 루터는 자신이 집필한 3천여 권의 책 가운데 『노예의지론』(1525년), 『대교리문답』『소교리문답』(이상 1529년)만을 수작으로 추천한다. 그중 『대교리문답』은 개신교 최초의 교리문답서이자 개신교적 성경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각 교파 교리문답서의 지침이 된다.
위대한 역사는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났다. 500년 전 루터는 과연 자신에 의해 종교개혁, 중세 유럽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꾸는 대(大)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을까? 아마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 조항』을 게시했을 때 종교개혁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거창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원했을 뿐이다. 로마교회의 개혁을 촉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원했던 바와 다르게 흘렀다. 상황이 순식간에 급변하여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가 선봉에 서게 되었다.
물론 정확히 말해서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것은 루터가 아니다. 루터 이전부터 종교개혁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앞선 종교개혁자들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루터에 이르러 폭발한 것이다. 어쨌든 루터가 폭탄을 투척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로마교회에 폭탄을 던지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그 시기는 늦춰졌을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선봉장
루터는 종교개혁의 최전선에 서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끊임없이 가르치고, 논쟁하며 로마교회에 맞섰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개혁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활발한 저술 활동은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일례로 1520년에 저술한 『기독교계의 상태 개선에 관하여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호소함』은 초판 4천 부가 며칠 만에 품절 됐고, 그 해에 15쇄나 인쇄됐다. 그리고 같은 해 루터가 쓴 책은 총 50만 부나 팔렸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12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바이마르판)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루터는 교회의 탄압에 엄청난 분량의 글로 맞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루터는 절박했고, 치열했다.
그처럼 루터는 엄청난 양의 글을 남겼지만, 그의 저작을 다만 몇 권이라도, 아니 단 한 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이름은 알지만, 그의 신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종교개혁의 결과는 알지만, 그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잘 모른다. 우리가 너무 안일함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의 혜택을 잘 누리고 있는 것일까?
종교개혁자 루터의 에센스
존 딜렌버거가 편집한 이 책은 감히 루터 전집을 대체할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의 저작물의 역서들 가운데 본 선집만큼 한 권의 단행본에 많은 저작물을 실은 책은 없다. 루터에 관한 책은 많지만, 번역된 그의 저작물은 많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은 루터 전집을 제외하고, 그의 작품을 직접적으로 참고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서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고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호소함』은 물론 종교개혁의 문을 연 『95개 조항』과 『하이델베르크 논제』와 『세속 권세: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는 전문(全文)이 실려 있다. 또한 존 웨슬리가 회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로마서 서문』, 그리고 『루터의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 등이 실려 있다. 본서에 수록된 저서들 가운데 일부는 전문(全文)이고, 일부는 발췌문이지만, 해당 저서의 핵심내용을 살피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본 선집에 실린 작품들만 이해하면 루터 신학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