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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가 개척한 우리 문학의 새 장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조선 제일의 판타지 문학
*한국 한문학 르네상스의 주역 김풍기 교수의 완역본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 등 필독 문헌 6편과 한시 원문 수록
“백 년 뒤 내 무덤에 무얼 적으려거든, 꿈꾸다가 죽은 늙은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김시습, 〈나 태어나〉 중에서). 세종대왕이 인정한 천재 김시습. 입신양명이 보장된 그였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불의한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승려가 되어 평생을 꿈꾸는 방랑자로 살았다. 몸은 홀가분해졌으나 정신은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문학으로 풀어냈고, 그 몸부림의 과정에서 지금껏 이 땅에 없었던 문학 양식을 확립했다. 바로 우리나라 소설의 효시라고 평가받는 『금오신화』다.
‘금오(金鰲)산에서 지은 새로운(新) 이야기(話)’라는 뜻의 『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이 실려 있다. 조선 전기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임진왜란 이후 국내에서 자취를 감췄던 이 작품은, 1927년 최남선이 일본에서 발견한 전문을 잡지 『계명』(啓明) 제19호에 수록해 소개함으로써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우리 민족의 사상·풍속·역사를 소재로 삼아 우리 땅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금오신화』 속 이야기들은 김시습 문학의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또한 비현실적 사건으로 현실의 문제를 꼬집는 역설적 구조가 돋보이며,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사랑을 통해 강렬한 삶의 의지를 드러낸다. 『금오신화』의 독창적인 구성과 탁월한 문학적 기법은 「운영전」과 「원생몽유록」 등 후대 작품들에 계승되었으며, 17세기 중엽의 일본 기담집 『오토기보코』(伽婢子)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 문학의 독보적인 자산 『금오신화』를 한국 한문학 연구 르네상스의 주역인 김풍기 교수의 완역본으로 선보인다. 율곡 이이가 왕명을 받들어 쓴 「김시습전」을 비롯해 저자의 삶과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주요 문헌 6편을 수록했으며, 279개의 방대한 각주로 역사적·문화적 배경지식을 충실하게 전한다. 한동훈 작가의 환상적인 일러스트와 곳곳에 배치한 시각 자료는 당대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면서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한다.
만복사의 저포놀이_만복사저포기
이생이 담 너머 아가씨를 엿보다_이생규장전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노닌 이야기_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 이야기_남염부주지
용궁 잔치에 다녀온 이야기_용궁부연록
김시습 깊이 읽기
해제
김시습 연보
지은이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峯)·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이다. 1435년 한양 성균관 북쪽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자를 깨쳤고, 세 살 때는 시를 지었다. 다섯 살이 되자 이계전과 조수의 가르침을 받아 유교 경전에 통달했으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재주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비단을 하사하면서 장차 크게 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삼년상을 마치고 남효례의 딸과 혼인한 뒤 1453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마음을 다잡고 삼각산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하던 중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절망한 나머지, 책을 불사르고 강원도의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때 출가해서 법명을 설잠(雪岑)이라고 했다.
1456년 사육신사건이 일어나자 방랑길에 올랐고, 전국을 떠돌던 중 1462년 경주 금오산에 터를 잡았다. 1465년에는 금오산실(金鰲山室)에 은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1472년 새 조정에서 일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상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락산에 터를 잡았다. 1481년에 돌연 환속해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재혼도 했지만, 1년 만에 상처한 뒤 다시 승려복을 입고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493년 부여 무량사에서 『묘법연화경』의 발문을 쓴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문을 떼기 전에 글을 먼저 알았던 그는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평생토록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생육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세상의 유혹에 맞서 때로는 미친 척하면서까지 진정한 자유를 추구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천재’요, 스스로 일컬은 것처럼 ‘꿈꾸다가 죽은 늙은이’였다.
그린이 ∥ 한동훈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단행본·전집·교과서에 그림을 그려왔고 기업과 공공기관의 광고 프로젝트도 다수 진행했다. 그린 책으로 제28회 MBC 창작동화대상 수상작인 『큰발의 산』을 비롯해 『수호지』, 『임진록』, 『흠흠신서』, 『그리스 로마 신화』, 『처음 세계사』 등이 있다.
옮긴이 ∥ 김풍기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강원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 국어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고전문학과 한시를 통해 다양한 사유를 접했고, 이를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서 소개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 고전 소설의 매혹』, 『선물의 문화사』, 『시힘』, 『김풍기 교수와 함께 읽는 오언당음』, 『어디 장쾌한 일 좀 없을까』, 『한시의 품격』,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등이 있고, 역서로는 『완역 옥루몽』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등이 있다.
전라도 남원(南原)에 양생(梁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여태 혼인도 못 하고 만복사(萬福寺)의 동쪽 방에서 혼자 살았다. 방문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때마침 봄을 맞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모습이 꼭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 덩어리가 달린 것 같았다. 양생은 달이 뜨는 밤이면 어김없이 그 나무 밑을 서성거리면서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한 그루 배꽃은 외로이 서 있는데 / 가련해라, 달 밝은 밤 져버리다니.
젊은이는 외로운 창가에 홀로 누웠는데 / 어디서 아름다운 이는 퉁소를 부는가.
-만복사의 저포놀이,| 13쪽
“도련님께서는 의심하지 마시고, 황혼 녘에 만나기로 약속하시지요”[將子無疑 昏以爲期].
이생은 쪽지에 적힌 대로 저녁노을이 질 무렵 그곳을 찾아갔는데, 갑자기 복숭아꽃 가지 하나가 담장 밖으로 나와 한들거렸다. 그가 가서 살펴보니 대나무 바구니가 그네 매는 줄에 묶여서 늘어져 있었다. 이생은 그것을 잡고 기어올라 담장을 넘었다.
때마침 동산에 달이 막 떠올라서 꽃 그림자는 땅에 드리워 있었으며, 참으로 맑고도 사랑스러운 향기가 났다. 이생은 마치 신선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남녀 간의 비밀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터럭이 모두 쭈뼛 서는 듯했다.
-이생이 담 너머 아가씨를 엿보다, 52-53쪽
홍생은 계단에서 내려와 담장 틈에 숨어서 그녀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미인은 남쪽 다락에 기대서서 달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시를 읊조렸는데, 풍류로운 태도에는 엄연한 법도가 배어 있었다. 시녀들이 비단 방석을 펴자 미인은 얼굴빛을 고치고 자리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시를 읊던 분은 어디 계신가요? 저는 꽃과 달의 요물도 아니고 연꽃 위를 걷던 여인도 아니랍니다. 다행히 오늘 밤, 만 리나 되는 하늘이 구름 걷혀 드넓고, 달이 높이 뜬 데다 은하수는 맑으며, 계수나무 열매 떨어지고 구슬 같은 백옥루는 차갑습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읊으면서 마음속 깊은 정을 펼치고 싶군요. 이처럼 좋은 밤을 어찌 보낼까요?”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노닌 이야기, 87쪽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폭력으로 백성을 겁박하면 안 됩니다. 백성이 비록 놀라고 두려워하여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반역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 무릇 나라는 백성의 것이며 명령은 하늘이 내리는 법입니다. 천명(天命)이 떠나가면 백성의 마음도 떠나가기 마련이니, 비록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싶어도 장차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박생이 이번에는 이단의 도를 숭상하다가 재앙을 만난 역대 제왕들의 이야기를 꺼내자 왕은 곧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백성이 칭송하더라도 수재와 가뭄이 닥치는 것은, 임금이 스스로 경계하고 근신하도록 하기 위한 하늘의 경고입니다. 백성의 원망이 자자한데도 상서로운 일이 나타나는 이유는, 요괴가 임금에게 아첨해서 더욱 교만하고 방종하도록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상서로운 일이 나타나는 때라면 백성은 편안한 시절이겠습니까, 원망의 마음을 부르짖는 시절이겠습니까?”
-남염부주 이야기, 123-124쪽
어느 날 저물 무렵이었다. 한생은 자기 방에서 편안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홀연 푸른 적삼을 입고 두건을 쓴 낭관(郎官) 두 사람이 공중에서 내려와 뜰에 엎드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박연에 계신 용왕께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한생이 깜짝 놀라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신과 인간은 길이 다른데 어찌 서로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수부(水府)는 넓고 아득한 곳으로, 물결이 사나우니 어찌 무사히 갈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말했다.
“준마(駿馬)를 문밖에 대기시켰습니다.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그들은 몸을 굽혀 한생의 소매를 잡아끌고 문밖으로 나갔는데, 그곳에는 과연 천리마 한 마리가 있었다.
-용궁 잔치에 다녀온 이야기, 130쪽
시험 지문으로 접해온 한국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
밑줄 긋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원작의 재미와 효용, 감동을 오롯이 전한다
“등잔불 돋우며 밤새도록 향 피우고 앉아, 인간 세상에서 본 적 없는 글을 한가롭게 짓노라.”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쓰고 나서 이렇게 술회했다. 설화, 패관문학, 가전체 등 우리나라 서사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중국 전기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을 더해 창작한 이 작품은 그때까지 “세상[조선]에서 본 적 없는 글”이었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날카롭게 드러나고, 정교한 구성과 서정적 묘사가 돋보이며,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독창성과 자주성을 보여주는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금오신화』는 오랫동안 ‘신비의 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이 땅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던 송시열조차 이 책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이렇듯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전설로 남아 있던 『금오신화』는, 1927년 최남선이 일본에서 발견한 원문에 해제를 덧붙여 『계명』(啓明) 제19호에 수록함으로써 다시금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많은 연구자의 수고 덕에 의의와 가치를 인정받은 『금오신화』는 학교에서 꼭 가르쳐야 할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수능과 국가고시에 출제된 터라 무척 중요하게 다룬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이 작품을 단지 출제 가능성 높은 지문으로 여길 뿐, 제대로 음미하거나 폭넓게 이해하거나 자신의 상황에 적용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면 머릿속에 『금오신화』라는 제목만 어렴풋하게 남는다. 입시 위주 교육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동서양의 양서를 보급해온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 고전의 진정한 재미와 가치를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선보인다. 번역은 안대회, 심경호, 정민 등과 함께 한국 한문학 연구의 르네상스를 열어가고 있는 김풍기 교수가 맡았다. 오랜 연구와 집필 경험을 토대로 원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오늘날의 독자들이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쉬운 문장으로 풀어냈다. 독서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279개의 방대한 각주를 달아 역사적·문화적 배경지식을 충실하게 전한다.
세종대왕이 인정한 천재 김시습,
그가 질곡의 세월을 견디며 끝까지 붙들었던
숭고한 이상과 사랑이 담긴 5편의 이야기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깨쳤고, 세 살에 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 때는 세종대왕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시습. 순탄할 것 같던 그의 앞길에 먹구름이 낀다. 숙부(수양대군)가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춘년이 쓴 「매월당선생전」에 따르면, 당시 21세였던 김시습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통곡하며 읽던 책을 죄다 불태우더니, 승려가 되어 방랑길에 올랐다고 한다. 훗날 세조가 법회를 열고 참석을 명했을 때도 그는 미친 체하며 뒷간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김시습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으며, 평생을 꿈꾸는 방랑자로 살았다. 하지만 몸은 홀가분해졌어도 정신만은 시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불교에서 고뇌의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한편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문학으로 풀어냈다. 그 몸부림의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금오신화』다.
‘금오(金鰲)산에서 지은 새로운(新) 이야기(話)’라는 뜻의 『금오신화』는 단편소설집이며, 본래 수록된 작품 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5편이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으로 꼽히며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은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이다. 두 작품 모두 귀신과 사람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귀신이 된 여인은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을 맺기 위해 남자를 찾아가고, 인연이 다하자 저승으로 떠난다. 남자는 여인에 대한 추억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다. 떠나기 전 여인은 남자에게 속내를 전하는데, 그녀들이 갈망했던 것은 그저 평범한 아낙네의 삶이었다. 하지만 왜구의 침략과 홍건적의 난리 통에, 그들은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한다. 김시습은 이들의 고된 삶을 통해서 현실의 냉혹함과 사랑의 숭고함을 드러내고 있다.
「취유부벽정기」는 유교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에 따라 기자조선을 강조하는 조선 전기 지식인들의 역사관을 잘 보여준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는 청년 시절의 꿈에 대한 일종의 헌사로 느껴진다. 「남염부주지」에서는 유학자로 출발해 승려 신분으로 살아갔으며, 우리 도교사(道敎史)에도 흥미로운 발자취를 남긴 김시습의 사상적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두 작품에서 김시습은 주인공의 입을 빌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독자에게 넌지시 환기한다.
「용궁부연록」의 무대인 용궁에는 어린 시절 세종의 후의(厚意)로 구경했던 궁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투사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이 지은 글을 통해 김시습의 빼어난 문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을 비롯한 필독 문헌 6편,
애틋한 정서를 품격 있게 담아낸 한시 원문,
한 폭의 시화(詩畫)처럼 기품 있는 일러스트 수록
어떤 작품이든 그 속에는 작가의 삶이 담겨 있다. 『금오신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려면 김시습이 어떤 삶을 살았고, 창작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 책에서는 “김시습 깊이 읽기”라는 장을 따로 두어서 김시습이 직접 쓴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올리는 글”과 『전등신화』를 읽고 쓴 글, 『금오신화』를 창작하고 소회를 밝힌 글을 비롯해 율곡 이이가 왕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 윤춘년의 「매월당선생전」, 남효온이 약술한 인명록을 수록했다. 이를 통해 작가의 성품과 사상, 창작 의도, 조선 시대 문인들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시습은 『금오신화』에서 자신의 장기라 할 수 있는 한시 창작 능력을 선보인다. 서사가 이어지다가 극적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시들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대화의 뉘앙스를 절묘하면서도 멋들어지게 드러낸다. 또한 직접 언급하지 않은 일들을 넌지시 알리며, 전체 분위기를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이끌어간다. 이 책에는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한시의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넣었다. 조금 낯설더라도 한시를 음미하며 읽다 보면, 저자가 묘사하려 했던 인물의 심정과 사건의 분위기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