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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석』제19권《사도행전》. 이 책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집필한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담고 있는 사도들의 설교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노용에서 태어났다. 칼뱅을 사제로 만들려 했던 아버지의 주선으로 지역 귀족 몽모르가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으며, 14세 되던 1523년 파리의 라마르슈(La Marche)대학에 입학해 라틴어를 배웠다. 같은 해 몽테귀(Montaigu)대학으로 옮겨 엄격한 금욕주의적인 경건 훈련을 받고 뛰어난 토론 기술을 습득했다. 1528년 오를레앙(Orlean)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이탈리아 부르주(Bourges)대학으로 옮겼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이 원했던 인문주의를 공부하고자 파리의 왕립대학으로 옮겨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다.
1528년 루터파 신자였던 법학 교수 볼마르(Wolmar)를 만나 헬라어를 배우며 종교개혁 진영의 인물들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1533년 코프(Nicolas Cop)가 파리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담긴 연설을 해서 박해를 받을 때 함께 쫓겨 다녔는데, 이때 만난 사람들이 종교개혁의 신학 사상을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해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써냈다.
파렐(William Farel)의 강권에 의해 1536년 7월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했으나 실패한 뒤 1538년 4월에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프랑스 피난민 목회를 했다. 이때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 부처(Martin Bucer)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 강요] 2판과 [로마서 주석]을 발간하며 학문적으로 성장했고 결혼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혼란에 빠진 제네바로 귀환 요청을 받은 칼뱅은 1541년 9월에 돌아왔다. 그곳에서 교회법을 제정하여 목사, 박사, 장로, 집사의 4중 직제를 만들어 장로교 제도의 기본적인 틀을 놓았으며,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컨시스터리(consistory- 장로회)를 설립해 제네바 시민들의 도덕적인 삶을 개혁했다. 종교개혁 사상을 해외로 전파하기 위해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인문주의와 함께 수준 높은 개혁주의 신학을 교육했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 사상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등으로 전파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까지 전파되었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대표 박명곤)에서 라틴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하는 칼빈주석 전집 사도행전(920쪽, 값 35,000원)이 출간되었다. 전23권으로 신구약 주석을 완간할 예정인데, 현재 공관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등 4권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와 있다. 그동안 칼빈 주석은 사실상 없었다. 1980년대 초에 성서교재간행사에서 전집이 완간되었으나, 번역이 나빠 그 후 절판되었고, 그동안 30여 년 동안 아무 곳에서도 칼빈 주석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에서는 2009년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을 기획하고, 순차적으로 출판하고 있다.
칼빈의 이미지는 보통 그가 [기독교 강요]로 대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을 조직신학자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한 사람의 주석가요 설교자로 생각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기본적인 사명이 주석과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칼빈의 주석을 편집했던 하루투니안(Joseph Haroutunian)은 "칼빈 신학의 모든 특징은 [기독교 강요]의 전문적인 주장들에서보다는 주석들의 직접적인 설명들에서 더 간결하고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다"고 말하였다.
찰스 스펄전은 칼빈 주석을 기독교 역사상 매튜 헨리 주석 다음으로 훌륭한 주석으로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칼빈 주석 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칼빈 주석은 그 책 무게만큼의 금덩어리 같은 가치가 있다. 모든 주석들 중에서 칼빈은 가장 솔직하다. 그는 공정하고 성실하게 성경의 의미를 해설한다. 어떤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정직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꼼꼼하고 주의 깊게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
칼빈의 반대자였던 아르미니우스(Arminius)조차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칼빈 주석을 정독하라고 되풀이하여 가르친다. 나는 칼빈이 성경의 해석에서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고, 그의 주석이 교부들의 저작 모두보다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칼빈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탁월한 예언의 은사를 소유했다고 인정한다." 스펄전은 "이 금언(격언)적인 주석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칼빈 주석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주석이 된다"고 말하였다. 리처드 백스터(청교도)는 "나는 사도 시대 이후로 칼빈보다 높이 평가하고 존경할 인물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에서 그의 판단력은 더욱 존중할 만하다"고 썼다.
칼빈은 '성경 주석의 왕'으로 불렸다. 그는 성경 해석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명료한 간결성'을 꼽고, 또한 주석은 본문이 의미하는 것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성경 해석에서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함께 적용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칼빈은 놀랍게도 최상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경이적인 신선함과 새로운 감각으로 일관성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칼빈 주석의 특징은 그 독창성과 깊이, 명료성과 건전성인데, 우리는 그의 주석에서, 본문을 다루고 있는 그의 명료하고 포괄적인 견해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파헤쳐 들어가는 그의 능수능란한 재능에서, 그리고 그 말씀의 의미에 부여하고 있는 명쾌한 표현에서 그의 무한한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